노엘 사계절 합작
Four seasons of Noël
지나치려다 시선을 끈 가게의 간판은 기묘한 푸른색이였다. 갓 시작한 더위 아래서 번진 물감이 한때 반듯하게 적힌 가게의 이름마저 못 쓰게 만들어 놓았다.
연습실로 향하던 노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트레이드 마크와 같던 긴 코트는 이미 벗어서 팔에 걸친지 오래다. 생긴지 제법 된 꽃집의 낡은 간판을 이 태양 아래에서 보고 있자니 자신마저 흐늘흐늘 낡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그는 충동적으로 가게 안에 들어갔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기념비적인 나의 첫 손님. 여기는 【 】입니다!"
제길. 짐짓 과다하다 느껴질만큼 친절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탕크림으로 지어만든 것 같은 장소라니, 여기는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자신의 당황한 기세를 눈치챈 건지 가게의 주인은 느긋하게 웃어보였다. 비단결같은 긴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올린 살짝 작은 체구의 여인이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관록이 만만치 않은 건지, 이런 잡다한 손님들쯤이야 얼마든지 겪어봤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에 용기를 낸 노엘은 뒤로 뺐던 발 반보를 다시 앞으로 옮겼다.
"…미안, 잘못 들린 거야. 옆 가게로 가려 했거든."
"어머, 정말요? 그래도 이왕 오신 김에 둘러보세요. 새로운 아이들이 아주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러면서 안고 있던 꽃다발의 윗부분을 슬쩍 기울여준 여주인은 편히 보라며 카운터 뒤로 몸을 옮겼다. 솜씨가 좋은 건지, 평소 꽃이 꽃이지 싶던 자신의 눈에도 그 꽃다발은 제법 아름다워 보였다.
알록달록하게 무리지은 향기에 낯간지러워하던 노엘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판매대기 중인 살아있는 상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말해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파란 꽃, 노란 꽃, 빨.. 덜 빨간 빨강에 약간 보라 꽃. 오, 이건 알겠는데?’
이름없이 중얼거리다가 관심을 보인 건 진열대 중앙쪽에 놓인 화병이였다.
“예쁘죠? 봄이 찾아와서 그래요.”
수국, 미니델피늄, 스타플라워에 안개꽃. 등 뒤로 성큼 다가온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노엘은 하얀 나뭇가지에 둘러쌓인 장미 한 송이로 손을 뻗었다.
“..특이한 색.....”
장미는 그 색마다 꽃말이 다르다고 들었다. 빨강은 제일 흔하니까 사랑이겠지. 불타듯 정열적인 사랑. 노랑은 질투라고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들었다. 하양이야 드레스처럼 희니까 신부를 위한 것이겠고, 파랑은 이룰 수 없는 게 이뤄졌으니까 기적, 초록색은 천국에서만 피는 꽃이라고 했던가.
지루한 음악은 하지 않겠다던 자신에게 뮤지션은 다양한 감성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며 웬 사전만한 두께의 '꽃 이야기'라는 책을 줄줄이 낭송한 그 매니저 녀석 덕분에 늘어난 잡지식이다. 하지만 녀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또 다른 장미를 노엘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아름답죠? 한장, 한장. 꽃잎을 섬세하게 수놓았답니다.”
“무지개? 아닌데... 누가 이렇게 주제없이 색깔을 섞어다 꽃아놓은 거야?”
노엘을 맞이한 꽃은 복수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미를 이루는 가장 바깥의 꽃잎부터 안쪽까지 꼭꼭 모인 제일 여린 꽃잎까지 각각의 장이 전부 다른 색을 이룬 그것은 가게에 단 한송이뿐이였지만 다른 모든 꽃을 압도하는 마력을 지닌 녀석이였다.
“검정에 보라, 하늘색… 보 파 초 주 빨? 이건 또 두 가지 색이네? 롤리팝도 이런 색은 아니겠어. …이쪽에 있는 건 병이라도 든 건가. 왜 이렇게 아픈 거 같지.”
불길한 검은색 바로 뒤에 무엇보다 희고 깨끗한 꽃잎이 한 장, 그 뒤를 잇는 청명한 저녁하늘 느낌의 검푸른 바탕에 금색 펄을 뿌린 것마냥 반짝반짝 빛나는 꽃잎을 신비하게 바라보던 노엘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름답죠?”
조용히 다가온 점주가 씨익 웃으며 꽃병을 성큼 들어 노엘의 손에 쥐어줬다.
이거 비싼 거 아니야!? 당황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노엘은 얌전히 그 병을 받아들었다. 깨지는 게 두려워서였지만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게 그 레인보우 로즈라는 녀석이야? 하얀 장미를 꺾어다가 물 먹여서 색을 입히는 게 있다고 들었어.”
나름 진지했는데 뭐가 웃겼는지 여주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 미안해요. 손님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암.”
묘하게 기분이 하락한 노엘이 뭐라고든 할까 싶어진 순간 그녀는 화병 위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런 거짓과는 같게 보지 말아줘요. 이건 현실이자 실존하는 환상. 그들은 살아있답니다.”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서 손을 흔들자 봄바람이라도 일렁인 것처럼 미풍 없는 가게 안에서 옅게 흔들리는 꽃잎들을 노엘은 입을 벌린채 바라봤다.
“그들‥?”
“몽환적이죠? 알아요. 그렇지만 아이들은 살아 숨쉬고 있어요. 시체를 꽃아 장식한 그런 죽은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주인의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왜인지 시선에 꿰뚫리는 느낌이 든 노엘은 황급히 맞장구치며 고개를 돌렸다.
단어 선택이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지만 맞는 말이야.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본 그 꽃은 여전히 통일되지 않았다. 뒤죽박죽 뒤엉킨 색이 십여장 정도 모여서 핀, 코사지처럼 작은 장미지만 일단은 아름답잖아?
“이 아이가 마음에 드시나요 손님?”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서라면 자연스러운 말인데도 머뭇거린 이유는 무지한 자신의 눈에도 그려지는 금액때문이었다.
“…아, 아니. 오늘은 정말 잘못 들어온 거라니까? 구경 다 했으니까 이만 가야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려 애쓰며 화병을 건네려던 노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결점에 신기해하던 노엘은 저기, 하며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하면서도 여주인에게 질문했다.
“이쪽 꽃잎은 일부러 떼어낸 거야? 꽤 큰데.”
겉쪽부터 센다면 하나, 둘… 여덟번째가 되려나? 꽃의 안쪽에 곱게 위치해야 할 위치가 송곳니가 빠진 아이의 이빨처럼 휑했다. 뜯겨다기보다 온전한 하나를 떼어다가 가진 것 같다고 해야할까? 한장이라기엔 크고 두 장이라기엔 애매한 크기의 빈 공간인 탓에 어떻게 보면 여덟번째임과 동시에 아홉번째 같기도 한 구멍이 거기에 있었다.
“아, 그건 말이죠…….”
별 망설임 없이 답변을 줄줄 내놓던 여주인이 침묵하자 꽃집 전체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문득 궁금해 졌다. 누가 봐도 꽃 같은 데에 관심 없을 생김새일텐데 나같은 게 뭐가 좋다고 이렇게 아끼는 꽃을 보여준 거지?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흔적이기도 하지만, 일단은 '없는' 것으로 해둘까요?”
"…뭐?"
“이해가 되질 않지요? 그래도 넘어가주세요 손님. 따져본다자면 이건 아주 조금 일찍 찾아온 당신이 나쁜 거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두리뭉술하게 넘어가려는 태도에 답답해진 기분에 노엘이 투덜거린다. 언뜻 점원이라기보다 나이차가 적은 어머니에게 투정부리는 사내아이같기도 했지만 여주인은 그런 모습을 묘한 눈길로 웃으며 내려다봤다.
그래.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그보다 작고 아담한 체구이였음에도.
“자아, 나는 이제 가게 문을 닫아야겠어요. 나의 마지막 손님, 당신도 그만 돌아가줘요. 당신에게도 자신을 마주할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요.”
“진짜 모르겠는데!? 그보다 말이 안 맞잖아. 아까는 꽃이 사고 싶으면 말하라며!”
울컥 화가 치민 노엘의 손을 잡아끈 여주인은 산들산들 가벼운 걸음으로 가게의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가게가 어두웠던건지, 둥근 문 모양으로 잘려진 바깥 세상은 무척 밝았다. 환하고 따스했으며 살짝 더운 기가 풍기는, 막 찾아든 봄의 한낮이 거기에 있었다.
귓가에 설핏 감긴 간지러운 멜로디에 자연스럽게 나가던 노엘의 등 뒤로 점주의 목소리가 휘감겼다.
“만약 이 꽃이 계속 생각난다면 그때는 나를 찾으러 와요 노엘.”
“…뭐?”
자연스럽게 불린 이름에 깜짝 놀란 노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툭, 바닥에 떨어진 검은 코트를 주울 생각도 못한 채 그는 황망함이 뒤섞인 앓는 소리를 냈다.
“사라졌어‥. 어디로 갔지?”
지금 막 가게를 나왔으니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한 건 어느 잡거빌딩의 유리벽이였다. 꽃집은 커녕 길가의 들꽃 한 송이조차 없는 반듯반듯한 신형 건물의 모습에 놀란 다람쥐처럼 주위를 살피던 노엘은 한숨과 함께 떨어진 옷을 주웠다.
“서서 꿈이라도 꿨나? 아, 그 망할 그라상. 배니스타를 위해서라면 해야한다면서 툭하면 이것저것 툭하면 피곤하게 만들더니 결국…!”
착각이겠지. 너무 선명해서 불안한 마음마저 들던 노엘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의 8비트 ‘쏙독새의 별’ 연주에 액정을 확인하곤,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치조? 그라상이 부르기라도 해?”
어느 정도 침묵하던 노엘은 곤란해하며 소리를 냈다.
“아니, 나도 안다니까? 그래서 혼자서 여기까지 왔잖아. 어플리케이션 사용 방법 몰라도 돼! 지구에 처음부터 그런 게 있진 않았다니까? 응, 그래 그래! 아, 잠깐만, 너 베터…… 야!”
이런! 그의 매니저는 성실하기 짝이 없지만 그와 동시에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어디 가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하기 콘테스트 메달권은 따놓은 당상이리라.
그나저나 아까 어디라고 했지? 가게 이름이, ASATO…. 어, 꽃‥집이였지, 아마? 거기에서 왼쪽으로 가라고 했어. 그러면 대충 나오지 않을까? 좋았어.
그래, 가는 길에 꽃집에 들리자. 거기에서 특별한 꽃을 사야지. 그라상 앞에 떡하니 올려놓으면 또 악상이 떠올랐다며 들들볶지 않을까? 그래도 괜찮다. 그 부숴버리고 싶은 선글라스가 하는 말은 다채로워서 희노애락 중 어떤 감정을 느낄지 나도 모르지만, 그가 만든 음악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으니까 말이야.
그리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를 떠올렸지만 무언가를 잊은, 혹은 잊힌 상태로 떠난 걸음은 어느때와 같았다. 그렇게 어스레한 뒷골목에서 걷다가 길을 잃고, 또 한번 서성거리다가 돌연히 어느 문짝에 손을 얹고, 뜬금없이 늘어진 계단에 한숨을 푹 쉰 다음에 이끌리듯이 오르기 시작한 그 모든 모습들은 모였다가 잘게 짓이겨졌다가 휘말리고는 뒤섞인 뒤, 다시 한번 꽃잎이 되어 환상을 장식하리라.
겨울의 별이 품은 시기와 가장 가깝지만 다시 한번 겨울이 되기까지 가장 먼 계절. 이것은 4월의 마지막 주, 어느 볕 좋은 날에 스쳐간 작은 리허설이다.

